- ‘LGBTQ’, ‘여성 연대극을 내포한 유사 가족’ 영화 강세, 배우들의 넘치는 힘도 주목
전주국제영화제(공동집행위원장 민성욱·정준호)가 한국경쟁 선정작 10편을 공개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약 3개월간 진행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공모에 165편의 영화가 접수되며 지난해에 이어 다시 한번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심사위원들의 심도 있는 심사를 거쳐 극영화 9편과 다큐멘터리 1편, 총 10편을 최종 선정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은 장르의 구분 없이 감독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을 소개하는 섹션으로, 한국영화를 이끌어갈 신인 감독들의 등용문으로 매년 주목받고 있다. 제22회 한국경쟁 대상 〈성적표의 김민영〉, 제23회 한국경쟁 대상 〈정순〉, 제25회 한국경쟁 대상 〈힘을 낼 시간〉 등 그간 한국경쟁을 거친 다양한 작품들은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거나 국제적으로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그 빛나는 작품성을 입증받아왔다.
올해 한국경쟁 심사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문석, 문성경, 전진수 프로그래머 3인이 참여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번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심사는 역대급”이었다며 “출품작의 숫자도 증가했지만, 영화의 질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 10편을 선정하는데 매우 어려웠다”고 극찬했다.
이어 올해 한국경쟁의 가장 두드러지는 키워드로 ‘LGBTQ’와 ‘여성 연대극을 내포한 유사가족’을 꼽았다. 심사위원들은 “LGBTQ 관련 영화는 한국단편경쟁에서도 강세를 보였다”며 “과연 한국 사회의 내밀한 변화가 자연스레 영화에 반영된 것인지, 영화인들의 희망이 투영된 것인지, 아니면 LGBTQ라는 소재를 영화제가 선호할 것으로 생각한 감독들의 의도 탓인지는 두고 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왼쪽부터 〈3670〉, 〈여름의 카메라〉
박준호 감독의 〈3670〉은 일명 한국 사회의 ‘초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는 탈북 게이 청년 철준이 탈북자 커뮤니티와 동성애 커뮤니티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과 함께 그의 사랑을 다루는 멜로영화다. 주인공인 여고생 여름이 학교 친구에게 느끼는 설렘과 아빠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엮은 성장 이야기인 성스러운 감독의 〈여름의 카메라〉는 상큼하고 희망찬 분위기가 특징이다.
영화제의 단골 메뉴인 유사가족 이야기는 올해 여성 연대극과 결합했다. 심사위원들은 “미투 사건 이후 전주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와 주류 영화계에서도 선보였던 여성 영화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왼쪽부터 〈생명의 은인〉, 〈숨비소리〉, 〈캐리어를 끄는 소녀〉
방미리 감독의 〈생명의 은인〉은 보육원 퇴소를 앞두고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세정이 어릴 적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하는 중년 여성 은숙을 만나 사기당한 전세 보증금을 받기 위해 동행하는 여정을 그린다. 이은정 감독의 〈숨비소리〉에서는 한 가족 3대의 여성들이 연대하며 삶을 꾸려간다. 윤심경 감독의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양부모에게 버려진 15세 소녀 영선이 부잣집 딸 수아의 테니스 코치를 하며 그의 엄마 지영과도 가까워지는 이야기다.
왼쪽부터 〈97 혜자, 표류기〉, 〈그래도, 사랑해.〉
정기혁 감독의 〈97 혜자, 표류기〉와 김준석 감독의 〈그래도, 사랑해.〉는 배우들의 힘과 훌륭한 앙상블을 보여주는 영화다. 〈97 혜자, 표류기〉는 서울의 보험사 콜센터에서 일하는 ‘부산 상여자’ 혜자의 로드무비다. 〈그래도, 사랑해.〉는 주인공 연극 부부를 통해 예술과 삶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왼쪽부터 〈겨울의 빛〉, 〈아방〉
조현서 감독의 〈겨울의 빛〉은 가족의 형편과 미래에 대한 의문을 안고 학교 밖으로 나가려 하는 고등학생 소년 다빈의 이야기를 그린다. 김태윤 감독의 〈아방〉은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이주하려는 청년 윤이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한편,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에 진출한 다큐멘터리는 단 한 편뿐이다. 심사위원들은 “소재나 만듦새가 나쁘지 않은 다큐멘터리가 많았지만 다소 상투적인 내러티브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소재를 잘 부각시키지 못하는 작품도 있었다”며 “출품작 중 이은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무색무취〉는 소재나 만듦새가 모두 완성도 높은 영화”라고 밝혔다.
〈무색무취〉
〈무색무취〉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조명한다. 공장에서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노출돼 온 재해 피해 노동자들의 업무 기록과 아카이브 자료를 바탕으로 빈번히 발생하는 산업재해의 근본적인 문제를 짚는다.
심사위원들은 “주류 영화산업의 침체가 독립영화계에 악영항을 미치고 있는 데다가 각종 지원마저 줄어들고 있는 녹록지 않은 실정에 질적으로 훌륭한 작품들이 다수 출품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라며 영화를 보내온 모든 창작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정부가 지원금을 축소하는 등 닥쳐온 재정난에 여러 영화제가 표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전주국제영화제의 책임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며 “전주국제영화제를 기점으로 한국영화가 불꽃을 태우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한국경쟁에 선정된 보석 같은 작품들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는 2025년 4월 30일(수)부터 5월 9일(금)까지 전주 영화의거리를 비롯한 전주시 일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선정작
가나다 순
작품명
감독
장르
〈3670〉 3670
박준호 PARK Joonho
극영화
〈97 혜자, 표류기〉 Drifting
정기혁 JUNG Kihyuk
극영화
〈겨울의 빛〉 Winter Light
조현서
CHO Hun-suh
극영화
〈그래도, 사랑해.〉 All Is Well, I Love You.
김준석 KIM Junseok
극영화
〈무색무취〉 Colorless, Odorless
이은희 LEE Eunhee
다큐멘터리
〈생명의 은인〉 SAVE
방미리 BANG Miri
극영화
〈숨비소리〉 The Sound of Life
이은정 LEE Eunjung
극영화
〈아방〉 Where is My Father?
김태윤 KIM Taeyun
극영화
〈여름의 카메라〉 Summer's Camera
성스러운 Divine SUNG
극영화
〈캐리어를 끄는 소녀〉 Sua's Home
윤심경 YUN Simkyoung
극영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심사평 전문
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심사는 역대급으로 어려웠다. 이는 출품작이 지난해 134편에서 165편으로 증가한 데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질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간 것이 선정 작업을 더 힘겹게 만든 듯하다. 주류 영화산업의 침체가 독립영화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데다 각종 지원마저 줄어들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렇게 질적으로 뛰어나고 양적으로도 상당한 한국 독립영화가 전주국제영화제의 문을 두드린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정부 지원금 축소 등 재정난 속에서 여러 영화제들이 표류하는 상황이나 극장과 OTT 등 플랫폼이 침체에 빠져있는 외적 환경이 또 다른 원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책임감 또한 더욱 커지는 듯하다.
결국, 한국경쟁작 10편을 꼽는 일은 정말 힘겨운 작업이었다. 선정된 영화와 탈락한 영화의 수준 차이는 극히 미세한 정도였고 이는 비경쟁 부문인 코리안시네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녹록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영화를 만들어 보내주신 모든 감독님과 제작진 여러분에게 전주국제영화제는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올해의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으로는 LGBTQ 성향 영화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과 여성 연대극을 내포한 유사가족 드라마가 다수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특히 LGBTQ 영화가 많았다는 사실은 한국단편경쟁에서도 나타났는데, 과연 한국 사회의 내밀한 변화가 자연스레 영화에 반영된 것인지, 또는 영화인들의 희망이 투영된 것인지, 아니면 LGBTQ라는 소재를 영화제가 선호할 것이라 생각한 감독들의 의도 탓인지는 두고볼 만하다. LGBTQ 소재를 다룬 영화로는 <3670>과 <여름의 카메라>가 있다. 박준호 감독의 <3670>은 한국 사회의 초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 탈북 게이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철준이 탈북자 커뮤니티와 동성애 커뮤니티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과 함께 영준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멜로영화다. 성스러운 감독의 <여름의 카메라>는 여름이라는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로, 학교 동료인 연우에게 느끼는 설레는 감정과 아빠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엮어놓은 상큼한 성장영화다. 어둡고 우울한 느낌이 강했던 그동안 LGBTQ 영화와 달리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유사가족 이야기는 영화제의 단골 메뉴이긴 하지만, 올해의 경우 여성 연대극과 결합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미투 사건 이후 전주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와 주류 영화계에서도 선보였던 여성영화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선 방미리 감독의 <생명의 은인>은 보육원 퇴소를 앞둔 세정이라는 소녀를 앞세운다.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살아가는 세정은 어릴 적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하는 중년 여성 은숙을 만나게 되고 함께 사기 당한 전세 보증금을 받기 위한 길에 나서게 된다. 이은정 감독의 <숨비소리>에서 연대하는 이는 한 가족 3대의 여성들이다. 서울에서의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20대 여성과 그의 어머니, 할머니가 함께 엮어가는 질박한 삶의 이야기다. 윤심경 감독의 <캐리어를 끄는 소녀>도 좀 느슨하긴 하지만 여성 연대극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양부모에 버려진 15살 소녀 영선이 엄청난 부잣집 딸 수아의 테니스 코치를 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는데, 영선은 수아의 엄마 지영과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된다.
올해 한국경쟁 진출작에는 그야말로 배우들의 넘치는 힘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있다. <97 혜자, 표류기>와 <그래도, 사랑해.>가 그러한 영화들인데, 두 작품 모두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각자의 연기력 뿐 아니라 서로의 합 마저 뛰어난 배우들의 앙상블이 주목을 끈다. 정기혁 감독의 <97 혜자, 표류기>의 중심 인물은 서울의 보험사 콜센터에서 일하는 혜자로, 그는 ‘부산 상여자’ 답게 거친 성격을 갖고 있어 고객과 문제를 자꾸 일으킨다. 이 영화는 서울 오피스텔에서 거주하기 위해 고향인 부산을 찾은 혜자가 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과정을 그리는 로드무비로, 거칠지만 힘 있는 드라마를 선사한다. 연극계를 배경으로 하는 김준석 감독의 <그래도, 사랑해.>는 연극 배우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예술과 삶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이를 키우느라 한동안 일을 쉬었다가 다시 연기를 시작하려는 소라와 연기에 대한 욕심이 있지만 이를 노골적으로 겉으로 내세우지 못하는 남편 준석의 웃픈 현실이 넉넉한 유머 속에서 펼쳐진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처럼 특정 경향으로 묶이지는 않았지만 <겨울의 빛>과 <아방>도 관심을 둘 만하다. 조현서 감독의 <겨울의 빛> 속 주인공은 고등학생 남자아이 다빈으로, 가족의 형편과 미래에 대한 의문 탓에 학교 바깥으로 삐져 나가려는 상황이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나란히 해외 교류 연수 프로그램에 가는 것이 유일한 꿈인 그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현실은 점점 어려워진다. 김태윤 감독의 <아방>에서 주인공은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이주하려는 청년 윤이다. 서울행 채비를 다 마쳐가는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윤은 제주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버지의 행방을 찾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실체를 짜맞추게 된다.
한편, 올해 한국경쟁에 진출한 다큐멘터리는 한 편 뿐이다. 소재나 만듦새가 나쁘지 않은 다큐멘터리가 많았지만 다소 상투적인 내러티브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소재를 잘 부각시키지 못하는 작품도 있었다. 이은희 감독의 <무색무취>는 소재와 만듦새가 모두 완성도 높은 영화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에서 빈번하게 나타나온 산업재해로 노동자들은 암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노출돼왔다. 이 영화는 이 같은 재해 피해 노동자들의 업무 기록과 아카이브 자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사회현상 저변에 자리한 문제를 짚어나간다.
올해 또한 한국경쟁 심사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세 프로그래머가 함께 했다. 다시 한 번 영화를 보내주신 모든 창작자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한다. 전주국제영화제를 기점으로 한국영화가 불꽃을 태우기를 기원한다.